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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적 마음의 구조를 구성한 이유

갓 태어난 아이들은 자아가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하나의 신체로서의 아이가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의식 영역에 있는 것들을 나와 타자로 구분할 수 없는데요. 그랬던 아이가 시간이 흐르면서 자아라는 심리적 형태를 갖추게 되고 청소년기, 성년기를 지나 페르소나도 가지게 되고, 자아와 페르소나가 숨기게 되는 부분은 개인적 무의식(아니마/아니무스,그림자)이 되어 마치 땅 속의 뿌리처럼 자라게 되죠.

이와같은 역동을 고려한다면 기존 분석심리학 책에 소개되는 둥근 원으로 구성된 마음의 구조로는 부족함을 느끼게 되어 직접 그려보았습니다. 

아래의 구조를 살펴보면, 원형 아닌 것을 찾기 힘듭니다. 대부분의 구성 요소들이 원형이고 집단적 무의식에 속하니, 저 나무의 씨앗이 땅 속(집단적 무의식)에서 싹텄으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죠.

 

 

 

 

무의식은 모든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개인적 무의식의 싹을 틔운다는 점이 의아하기도 합니다만 무의식과 의식은 기꺼이 원형이 개인화되어 자라나가는 터를 제공하는 듯 보입니다.

즉, 의식에서는 자아와 페르소나가 자라나가고, 무의식에서는 개인적 무의식인 그림자와 아니마/아니무스가 자라나가죠. 의식과 무의식 중 더 중요한 것을 찾는다면 무의식인데 모든 것의 핵심인 자기(self)원형이 있기도 하고 아이가 태어났을때 첫 시작도 무의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원형이 존재하는 곳들도 바로 무의식 영역이죠. 

자아와 개인적무의식 역동 측면에서 재구성한 <마음의 구조>

시공간에 갇혀있는 마음

사람으로서 살아가다보면 왜 이런 고통, 기쁨 각종 감정들을 필연적으로 겪게되는 것일까 의문을 가진 적이 있는데요. 위의 구조를 그리다보니 나름대로의 단편적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답은 시간과 공간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위 구조에서 나무는 싹을 터서 태어난 후 부터 제 몸이 사라질때까지 의식 및 무의식 영역에서 계속 자라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의 나무같은 존재가 '제한된 신체'를 가지고 '의식'이란 시간과 공간에 갇혀 '의식'의 영향과 '무의식'의 도움을 받아 잠시 살다 사라지는 구조이죠.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제한적 시공간에 하나의 몸을 갖고 살고 있으므로 현 인간의 경우 남성, 여성 중 하나의 성으로 선택되어 태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자아가 생기고 수많은 페르소나 들 중 하나를 선택해 타인과의 원만한 생활을 시작하죠. 여기가 중요합니다.

하나의 성으로 태어난다는 것과 임의의 페르소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반대 영역을 발생시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앞면이 있으면 뒷면이 있으니까요. 즉 의식엔 하나의 성으로 선택된 자아가 있고, 무의식엔 하나의 성으로 선택된 아니마/아니무스가 있습니다. 같은 원리로 의식에 페르소나라는 겉 껍데기가 있고, 무의식엔 그림자라는 겉껍질이 있습니다.

의식과, 무의식으로 위치한 영역은 다르지만 자아와 아니마/아니무스는 짝입니다. 의식영역에서 페르소나와 자아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무의식영역에 있는 아니마/아니무스가 구원투수로 나섭니다. 왜 그런 역동이 생길까 생각해보면, 다시 말해 왜 이런 큰 희노애락을 느끼게되는걸까 생각한다면, 이 나무가 사라지기 전 까지 나무의 할 일은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육체가 아니라 심리적인 자라남, 성장을 말하는 겁니다. 

 

자아 VS 아니무스/아니마 그 극과 극의 방향성

개인적인 페르소나, 자아 선택에는 가치판단이 들어가 열등한 것을 그림자, 아니마/아니무스에 넣었겠으나, 실제 그림자, 아니마/아니무스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닌 N극과 S극 처럼 방향성만 다른 것 입니다. 그러니 사람 A에게는 그림자가 된 페르소나가 사람 B에겐 떳떳하게 장착하고 살아갈 페르소나일 수 있고, 내가 열등하다 생각해 무의식에 억압한 여성상(아니마)이 어떤 여자에겐 건강한 자아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페르소나'의 무의식 영역 짝인 '그림자'에 대한 융의 명명이 아쉽습니다. 의식에 드러나있는 것은 잘 보이고, 반대편에 있는 무의식은 상대적으로 어둡고, 페르소나와 연동되어 움직인다는 의미를 담아 융이 고른 단어가 '그림자'인 것 같은데 가치판단의 정도에 따라 일정부분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어보입니다. '그림자'를 '무의식 방향 페르소나'로 명명하면 이런 오해 없을 것이라는 사견입니다.  

 

삶의 의미 : 아니무스/아니마가 자기(SELF)로 인도하는 험난한 길

의식의 자아가 총체적 정신체계의 중심인 자기(SELF)를 만나 동화되어 인격의 통합을 이루는 것이 위 그림에 그려진 나무의 목표입니다. 나무가 목표로 향하는 길은 험난하다고 소문 나 있는데요. 어떤 길인지 표준형으로 알아보겠습니다. 표준형 외의 다른 유형은 다른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나무의 목표지점인 자기(SELF)는 무의식 안에 들어있는데, 볼 수 없고 잡을 수 없어 알기 힘든 어떤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SELF)를 알아야 나무의 목표를 이룰 수 있겠죠. 이를 위해 땅의 영양분이 나무를 키워주듯 사람은 무의식으로부터 힌트를 받습니다.  무의식은 의식 영역 사람들을 볼 때 잘못된 콩깍지를 씌워주고(투사) 말도 안되는 이미지(꿈)을 보여줍니다. 이 콩깍지(투사)때문에 사람들과 갈등이 일어나고, 꿈 때문에 마음이 뒤숭숭해집니다. 사람이 좋아하는 선물이 뭔지 모르는 외계인 같은 '무의식'. 사람들은 그런걸 선물이라고 하지 않는데, 무의식은 최선의 선물을 한 거랍니다. 

이 외계인(무의식)의 선물 허들을 넘어야합니다. 콩깍지(투사)때문에 일어난 사람들과의 갈등을 통해 자기 그림자를 깨닫고, 풀어쓰자면, 이 갈등을 통해 다투던 타인과 나는 꺼내 쓰고 있는 페르소나가 다를 뿐이지 그림자, 페르소나 종합해보면 갖고 있는게 다 비슷하고, 내가 나와 다투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깨닫는 겁니다. 꿈의 경우는,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꿈의 상징에 대해 여러 방향(자신/타인)으로 곱씹다가 운이 좋으면 어렴풋이 꿈이 말하고자하는 방향성을 알게됩니다. 이렇게 그림자를 깨닫고 인정하게 되면 내면이 성장하고, 자기 내면의 아니마/아니무스를 알게됩니다. 

이렇게 그림자라는 겉 껍질을 벗은 아니마/아니무스는 자기(SELF)로 가는 길에 연결되는 뿌리를 내려줍니다. 위 구조도에도 아니마/아니무스가 그림자 껍질을 벗고 자기(SELF)에 닿아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기(self)에 아니마/아니무스 뿌리가 닿았을 때 신호가 있습니다. 무의식 땅 속 신호이다 보니 아주 미세한데요. 남자에겐 알 수 없는 부정적 기분이 느껴지고, 여자에겐 밑도 끝도 없는 부정적 의견이 생겨납니다.

이 두번째 허들도 아주 넘기 힘든데요. 첫번째 허들을 넘었듯이 의식에서 끝없이 피어오르는 아니마/아니무스의 부정적 기운(남자는 기분/여자는 의견)으로 발생되는 각종 사건 사고 갈등을 넘어가야합니다. 이 허들을 하나 하나 넘는 중 무의식에 억압되는 것이 있는지 잘 살피면서. 다시 말해, 본디 태어나기론 하나의 성별로 태어나 사회화 되었으나 이제는 여성성 남성성 중 어느 한 쪽을 열등하게 보지 않도록 살피는 것이죠. 기존에 열등하게 여겼던 여성성/남성성(아니마/아니무스)이 있었다면 그것의 가치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강점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상대성의 기능을 사용해보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삶에 생명력과 활기가 생기고, 온전한 인격과 개성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기실현의 방향, 자기(self)와 조금씩 통합되는 방향으로 가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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