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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습니다. 여성이 있으면 남성이 있고, 대부분의 경우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는 선택하지 못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제한된 시공간 안에서 제한된 몸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과 제한된 성, 제한된 시간, 제한된 공간만 갖고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제한되고 선택되어져 있다는 것은 삶이라는 이 상황이 어떤 메커니즘에 의한 것이거나 어떤 존재가 선택해서 부여한 것이라는 두 선택지가 떠오릅니다.

무의식이 선택한 나의 삶

이 선택은 삶 이전의(태어나기 전의) 내가 했을 수도 있고,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시스템(주역 etc) 같은 것이 일정기준에 의해 선택한 것일 수도 있겠네요. 만약 그런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시스템이 있다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만든다는 행위는 주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주체가 무의식이라 생각합니다.나 역시 무의식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위 두 선택지는 결국 같은 것입니다.

그 근거는 아기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은 무의식상태로 본능에 따라 사는데, 자아가 없으며, 나와 엄마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즉 보이는 모든 것이 나인 상태입니다. 그러다 자아가 만들어져 가고, 자신의 성을 알게되고 남과 다른 개성도 찾아가며 삶을 살아가죠. 나를 태어나게 한 무의식은 그 과정에서 여러 방법(꿈, 투사 등)으로 이번 삶에 배워야 할 과제를 알려줍니다. 그것을 의식이 무시하게되면 무의식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방법(병, 심리적 증상)을 겪게 하며 꼭 그 배움을 실천해서 더 성장하도록 이끕니다. 마지막으로 죽음은 이 몸과 마음으로 더 경험하거나 느끼거나 성장할 것이 없을 때 일어나는 것이라 추측됩니다.

선택을 통해 배우는 삶

선택에 담긴 적극적 의지

정리하자면, 사람은 무의식이 특정한 목적이 있어 죽음과 삶 중 삶을 선택하게 했고, 여성, 남성 중 하나의 성을 선택해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이 몸과 마음으로 태어난 세상을 경험하고 성장하기 위해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택입니다. 여러 맛의 사탕이 있습니다. 하나의 사탕을 선택해 먹게되면 다른 사탕의 맛은 알 수 없죠. 내가 만약 남자라면 동시에 여자가 될 수 없는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러 맛의 사탕을 함께 다 먹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또 내가 남자이면서 동시에 여자라면? 각 사탕의 맛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요? 남자의 마음, 여자의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요? 하나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제대로 알고 경험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 해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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